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퐁파두르 부인 (문단 편집) === [[7년 전쟁]]에 개입하다 === 다만 [[외교]]적 성과는 그만큼 뛰어나지 못해서, 반 프로이센 동맹에 참여하면서 [[7년 전쟁]]에 개입했다. 하필 이때 당시의 프로이센 국왕은 훗날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까지 불리는 명군 프리드리히 2세였다. 프리드리히 2세가 퐁파두르의 원래 성인 푸아송(Poisson)을 가지고 "생선집 아가씨"라고 비웃은 게 프랑스에 퍼졌고, 이로 인해 퐁파두르의 이미지가 비호감이 되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2세가 얼마나 퐁파두르를 미워했냐면 기르던 개들 중에 밉살맞은 개한테 퐁파두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생각날 때마다 괴롭히고 때렸다고 한다. 당연히 이 얘기를 들은 퐁파두르는 그야말로 격분.] 애초에 외교적으로 프랑스와의 동맹을 주도한 건 오스트리아 대사 카우니츠였고, 프랑스에서는 방어동맹 정도만 관심이었지만 현재의 [[벨기에]]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산업혁명]] 이전 [[벨기에]] 지역은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 중 하나였다. 괜히 15세기 ~ 16세기의 [[부르고뉴 공국]]이 프랑스 왕국에서 독립하려 한 것이 아니다. [[루이 14세]]가 자연 국경선 드립치면서 계속 침략했지만 현재 프랑스의 [[릴(프랑스)|릴]]지방의 코딱지만큼만 정복했을 정도로 그다지 성과는 없었고, 불과 십수년 전이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도 침공할 정도로 탐을 냈다.]를 동맹의 대가로 조공을 바친다는 꾐에 빠져 공격 동맹까지 덜컥 맺어 버린다. 이 결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손을 잡게 되었다([[동맹의 역전]]). 단, 최종 결정은 어디까지나 [[루이 15세]]가 한 것이 맞다. 군국 대사를 왕의 허락없이 또 사회 경제적 이유 없이 단지 친하다거나 누가 싫다고 해서 하던 시대는 분명히 아니었기 때문에. 퐁파두르도 정부 관료도 고위 귀족도 아니고 왕의 비호로 권세가 조금 있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왕의 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삼부인 동맹'이라고 불렸을 정도이기는 했다. 7년 전쟁은 초반부터 불운의 연속이었다. 처음부터 [[로스바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같이 개박살이 난 뒤 하노버 방면에 지속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민덴 전투]]. [[바르부르크 전투]], [[빌링하우젠 전투]], [[빌헴스타흘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번번히 패해 프로이센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 영국과의 싸움이 주 전장이었다. [[프랑스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루이 14세]] 때 유럽 최강이던 군대가 한번에 박살난 건 퐁파두르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자거나 다른 이가 제공한 뇌물을 받아챙기고 무능한 [[똥별]]을 기용한 탓이 컸다. 대표적으로 수비즈 공 [[샤를 드 로앙]]. 능력도 없는 주제에 가문빨과 퐁파두르와의 친분으로 원수가 된 후 '''[[로스바흐 전투]]를 말아먹었다.'''[* 참고로 이 사람은 prince estranger(프랭스 에스트랑주)인데 이 경우 프랑스 궁정에서 '''준왕족 취급을 받는다'''. 다른 prince estranger는 '''로렌-기즈 가문'''(엘뵈프 분파의 경우 1825년 단절, 기즈 본파는 1674년. 참고로 [[https://en.m.wikipedia.org/wiki/Charles_Eugene,_Prince_of_Lambesc|마지막 당주]]는 혁명 이후 망명해서 [[오스트리아]]에서 죽는다. 참고로 이 사람은 [[프랑스 혁명]] 당시 [[4.19혁명|기병대로 군중을 습격하여]] 다치게 했다고.), '''사부아-카라냥 가문'''(이탈리아어로는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 후일 통일 [[이탈리아]]의 왕이 된다 - 여전히 존재하지만 [[베니토 무솔리니]]의 [[제 2차 세계대전|삽질]] 때문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리말디(Grimaldi) 가문'''(존속), '''곤차가 분파(곤차가느베르 공작, House of Gonzaga-Nevers'''(1629년 본가 단절로 만투나 공작이 됨. [[페르디난트 3세]]의 3번째 부인 엘레오노라 디 곤차가의 가문), '''라 투르 도베르뉴(La Tour'd Auvernue)'''(튀렌으로 대표되는 - 부이용 공작령 소유 가문으로 그 공작령은 주권을 가진다. 1913년 단절), '''라 토레모이유(La Tremoilie) 가문'''(15세기 나폴리의 왕위 계승 예정 가문, 남계는 1933년 단절 - 참고로 여계는 계속 이어지고 현재 벨기에의 리네 가가 이어받아 성이 de Linie-La Tremoilie가 되었다.)이 있다.][* 이 사람의 '''로앙(Rohan) 가문'''은 과거에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주인 덕에 이 칭호를 얻었는데 이 사람이 당주인 수비즈(soubise)파는 이 사람 때 단절되고 종가인 게메네(guemene)파는 혁명 때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파의 당주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법대를 나와 외교관으로 일하고 현 유럽의회 의원이다. 프랑스에도 분파가 하나 있는데 이 분파의 당주는 [[니콜라 사르코지]]의 측근이다. 그 외에도 30년 전쟁 중에 망명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에두아르가 만든 '''비텔스바흐-팔츠-짐메른(Wittelsbach-Palantine-Simmern)'''가문, '''뤽상부르-피네(Luxemburg-Piney)'''가문 등이 있다.][* 참고로 프랭스 에스트랑주는 외국의 왕족들 중 프랑스로 온 방계왕족(기즈, 사부아-카라냥, 곤차가느베르, 뤽상부르피네, 팔츠-지메른) 혹은 외국 왕실과 연결된 고위귀족이(로앙, 라 트레모이예, 라 투르 도베르뉴) 받는 칭호다. 참고로 이들의 경우 '''국왕이 작위를 인정해 주어야만''' 왕족 행세를 할 수 있었다. [[뻘짓|인정해 주지 않은]] 경우 [[신성로마제국|외국]]으로 [[망했어요|떠나기도 했다고]]. 프랑스로 망명한 외국의 통치자들(ex. [[제임스 2세]],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엠마누엘]])의 경우 에스트랑주가 아닌 '''공식적 통치자 대접'''을 받았다. ][* 하지만 외국과 연결된 귀족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에스트랑주인 것은 아니다. 일례로 뤽상부르피네의 상속녀와 결혼한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윌리엄 3세]]의 숙적 몽모랑시 원수)는 에스트랑주가 되지 못했다. 그 외에도 뮐랭(Melun)가, 라 로슈코필드 가(당주가 낭트 칙령 당시 영국으로 망명했음) 역시 외국과 연계된 대귀족임에도 되지 못했다. 즉 국왕의 선호도 어느 정도 작용하는 듯.] 그래도 수비즈 공작은 상대가 [[프리드리히 대왕]]이라는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고 나중에 [[1차 루텐베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공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러나 [[빌링하우젠 전투]]와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삽질도 했다.], 리슐리외 공작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는 최악이었다. 그 유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종손인 그는 하노버를 침공한 프랑스군을 이끌고 대부분의 하노버 영토를 점령한 뒤 클로스터르제벤 협약을 체결해 하노버를 전쟁에서 이탈시키고 연합군이 해산되게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후엔 하노버를 심각하게 약탈해 하노버 국민들의 적의를 샀고 점령지에서 거둬들인 세금의 4분의 3을 횡령하고 병사들에게 들어갈 봉급을 가로채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비즈 공작이 로스바흐 전투에서 패한 뒤 연합군이 재결성되어 공세를 재개했을 때, 그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밀려나다가 1758년 2월에 경질되었다.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중죄를 지은 그였지만, 퐁파두르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군직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그쳤다. 전쟁 후반에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사망하고, 이어 즉위한 외조카이자 '''[[독일]]''' 출신(정확히는 [[덴마크]]와의 접경지대인 슐레스비히 - 홀슈타인 지방)인 [[표트르 3세]][* 이 짓을 해서 전쟁을 말아먹고 6개월 뒤 부인인 [[예카테리나 2세]]에게 왕위를 뺏겼다.(…)]가 구제불능의 프리드리히 2세 [[빠돌이]]라서 중요 동맹인 [[러시아]]가 빠지는 바람에 전세가 급변, 전쟁 막바지에 다시 한번 기회를 틈타 [[영국]]과 동군 연합인 하노버에 찝적거려 봤지만 영국 하노버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7년전쟁 유럽 전역은 아무 소득 없이 자원 낭비만 하고 끝난다. 오스트리아에 대가로 받기로 한 [[벨기에]]도 못 받았다. 한편 이 전쟁의 여파가 어느 정도였냐면, [[유럽]]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아메리카에서 [[프랑스]]가 영영 패권을 잃은 계기가 된다. 해외 [[식민지]]를 날린 것은 물론 얄밉기 그지없는 [[영국]]이 아메리카까지 꿀꺽하는 결과가 되니, 이 사태를 당한 국민들이 퐁파두르 까가 된 것도 이해는 간다. 그래도 그 독한 프리드리히 2세를 한때 자살 생각[* [[프리드리히 2세]]는 훗날 "이 당시에, 나는 독약이 든 로켓을 늘 목에 걸고 다녔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까지 할 정도로 몰아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설령 7년전쟁에서 이겼다 할지언정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그렇다 쳐도 실익은 미미했다. 유럽 전역에서 지상전에선 활약이 없어서 오스트리아에서 당초 대가로 주는 것도 철회했기 때문에... 그리고 [[인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패퇴는 유럽전역 결과와 달리 이미 쳐발리는 게 기정사실이라서 유럽전 승리로 대가를 조금 챙겼더라도 밑지는 장사였을 것이다. 그래도 [[리슐리외 추기경]] 이후 계속 오스트리아에 적대 노선을 걷던 [[프랑스]]의 방향을 선회, 오스트리아와의 평화 노선을 추구하고 덕분에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의 긴장 상태를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이 평화노선의 결실로 그녀 사후 그 유명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 동맹이 성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